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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여행이라고 하면 무조건 바다만 떠올리시나요?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기장에 400년 된 사유림이 있다는 걸 알고 나서, 솔직히 '부산에 이런 곳이 있었어?'라는 생각부터 들었습니다. 가을에 직접 다녀온 아홉산숲,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고 하고 기회가 다시 온다면 가보고 싶은 곳입니다.

400년 사유림 아홉산숲의 정체
남평 문 씨 일가가 약 400년에 걸쳐 조성하고 보존해 온 사유림(私有林)입니다. 사유림이란 국가나 지자체가 아닌 개인이나 법인이 소유·관리하는 산림을 뜻합니다. 국내 전체 산림 면적의 약 67%가 사유림에 해당한다는 사실이 있지만(출처: 산림청), 이처럼 수백 년간 훼손 없이 유지된 사례는 흔하지 않습니다. 규모는 약 52만 평으로, 아홉 개의 봉우리가 이어진 산세에서 이름이 유래했습니다.
제가 직접 걸어보니 이 공간이 '관리된 자연'과 '방치된 자연' 사이 어딘가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인위적인 조경이 아니라 수종 자체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어서, 걷는 내내 숲이 오래됐다는 게 몸으로 느껴졌습니다. 맹종죽(孟宗竹), 금강송, 편백나무, 삼나무, 은행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구간마다 달리 펼쳐지는데, 수종이 바뀔 때마다 향기와 빛의 질감이 달라지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입장료는 아래와 같이 구성되어 있으며 개인 사유지인 만큼 부과되는 금액입니다.
- 성인: 8,000원
- 경로·단체: 7,000원
- 5세~청소년: 5,000원
- 장애인·국가유공자: 5,000원
처음엔 사유지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다는 점이 조금 낯설었는데, 직접 걸어보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보니 오히려 이 정도 관리 수준을 유지하려면 입장료가 필요하겠다 싶었습니다.
피톤치드와 수관울폐 힐링 산책
편백숲 구간에 들어서는 순간, 제 경험상 다른 숲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청량감이 있었습니다. 이 청량감의 정체는 피톤치드(phytoncide)입니다. 피톤치드란 식물이 해충이나 세균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분비하는 휘발성 물질로, 사람에게는 면역력 강화와 스트레스 호르몬 감소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국립산림과학원 연구에 따르면 편백나무 숲에서 측정된 피톤치드 농도는 일반 침엽수림 대비 높은 수치를 기록합니다(출처: 국립산림과학원). 여기에 더해 아홉산숲은 수관울폐도(樹冠鬱閉度)가 높은 편입니다. 수관울폐도란 숲 위쪽에서 나뭇가지와 잎이 하늘을 얼마나 덮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로, 이 수치가 높을수록 직사광선이 차단되어 여름에도 서늘하게 걸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가을 햇살이 꽤 강한 날이었음에도, 숲 안쪽은 그늘이 촘촘하게 이어져서 걷는 내내 땀이 많이 나지 않았습니다. 여름 방문을 고려하시는 분들께는 특히 좋은 조건입니다. 다만 햇살이 숲 사이를 뚫고 내려오는 구간에서는 눈이 상당히 부셨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 보니 선글라스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습니다.
대나무숲이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
가장 인상 깊었던 구간을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맹종죽(孟宗竹) 군락지입니다. 맹종죽이란 대나무 품종 중 하나로, 줄기가 굵고 성장 속도가 빨라 군락을 이루면 시각적으로 압도적인 밀도를 형성합니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갑자기 이 군락이 시야를 가득 채울 때, 제가 직접 봤는데도 '여기가 부산 맞아?'라는 말이 먼저 나올 정도였습니다. 바람이 불 때 대나무 줄기끼리 부딪히며 나는 소리는 녹음해두고 싶을 만큼 특별했습니다. 사진 찍기에도 유리한 조건인데, 길게 뻗은 대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자연스러운 광량을 만들어줘서 별도 조명 없이도 분위기 있는 사진이 나왔습니다. 달의 연인, 군도, 대호 등 여러 영화·드라마 촬영지로 쓰인 배경도 바로 이 특유의 밀도감 덕분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걷다 보면 "이 각도에서 찍었겠다" 싶은 포인트가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자연광 사진을 즐기시는 분이라면 오전 시간대 방문을 추천드립니다. 빛의 방향이 오후보다 훨씬 유리했습니다. 전체 코스를 다 돌면 약 1시간에서 1시간 30분 정도 걸립니다. 이정표가 잘 정비되어 있어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고, 돌담길과 흙길이 적절히 섞여 있어 발의 피로감도 덜했습니다. 유모차 이동이 어려운 구간이 일부 있으므로, 어린아이와 함께 오신다면 아기띠를 준비하시는 것이 현실적입니다. 코스 후반부에 위치한 한옥 정자 관미헌(觀美軒)에서 잠시 앉아 쉬었습니다. 관미헌이란 아홉산숲 내에 조성된 전통 한옥 형태의 정자로, 마루에 앉으면 숲 전체가 시야에 들어옵니다. 새소리와 바람 소리 외에 다른 소음이 없는 그 10분이, 저에게는 이번 부산 여행에서 가장 조용하고 온전한 시간이었습니다. 주차는 입구 바로 앞 주차장에서 1시간 30분 무료로 가능하며, 산책 한 바퀴를 여유 있게 마치기에 딱 맞는 시간입니다. 대중교통 접근성은 다소 제한적이어서 자가용 이용이 사실상 필수입니다. 이 점은 차량이 없는 여행객에게 아쉬운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볼거리가 화려한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오고 나서 "또 오고 싶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습니다. 계절마다 수종의 색이 달라지는 공간이라 봄 벚꽃이나 여름 녹음 때도 다를 것 같았습니다. 부산 여행 일정에 하루쯤 바다가 아닌 숲을 끼워 넣고 싶으시다면, 아홉산숲은 충분히 그 선택을 후회 없게 만들어줄 공간입니다. 이곳은 여인도 좋지만 아이들이 더 좋아할 것 같은 공간입니다. 공기 좋은 곳에 아이들 부모님들과 함께 바다도 좋지만 숲이 있는 여름의 여행도 추천드립니다.

